[미술로 보는 세상] 안개 속에서 찾는 것들

도광환 기자 = 안개는 자연현상의 하나일 뿐이지만 시가 되고, 노래로 불리고, 그림과 음악으로 변신한다.

'짙은 안개 속으로 새벽 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를 들으려 했소'

정태춘이 부른 '북한강에서' (1985) 일부다. 안개는 80년대의 우울과 신음을 상징하는 매재(媒材)가 됐다.

북한강 의암호 안개 (2011)
북한강 의암호 안개 (2011)

이상학 기자

북한강 의암호 아침 안개를 찍은 사진이다. 색들을 모두 삼킨 짙은 안개는 한 편의 수묵화 느낌을 자아낸다. 정태춘이 노래하는 '신비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정태춘은 신비에만 머물지 않았다.

'강물 속으로는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마음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히며 흘러가고', 라고 읊조리면서 자아를 찾아 나섰다.

정태춘 이전에 정훈희가 부른 '안개'(1967)는 2022년 박찬욱이 만든 영화, '헤어질 결심' 모티브가 되면서 화제가 됐다.

이 곡은 김승옥 대표 소설인 '무진기행(霧津紀行)'(1964)이 영화로 만들어질 때 주제곡으로 쓰이기도 했다. 연인을 잃은 절박한 사랑은 안개에 묻혀 방황한다.

'아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조선 후기 김홍도 동료였던 도화서 화원, 이인문(1745~1824)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는 제목에 '안개(霧)'가 없지만, 은은한 안개가 드리워져 있다. 안개는 '신비'도 아니고 '방황'도 아니다. '그리운 산하'를 품고 있다.

'강산무진도' 전시 장면
'강산무진도' 전시 장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가로 8.5미터가 넘는 초대작에 가을 산천과 기암절벽, 풍요로운 마을을 묘사했다. 360여 명의 사람과 100여 척의 배를 그리며 백성들이 지향했던 이상적 자연을 갈구하고 있다.

'강산무진도' 부분
'강산무진도'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인문은 김홍도에 가린 이인자였지만, '강산무진도'에 담은 서사만큼은 일인자로서 손색이 없다.

'강산무진도' 부분
'강산무진도'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양 회화에서 안개 색과 감성을 농밀하게 그린 화가가 있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1834~1903)다.

미국인으로 파리를 거쳐 런던에 정착한 그는 템스강의 안개에 사로잡혔다. 그가 그린 런던의 안개는 '고독한 인간'이라는 주제에 수긍하듯 융합했다.

'녹턴-파랑과 연두' (1875)
'녹턴-파랑과 연두' (1875)

런던 테이트 브리튼 소장

안개는 그를 음악 세계로 불러들였다. '야상곡(夜想曲)'을 뜻하는 '녹턴(Nocturne)' 제목으로 안개 가득한 풍경을 다수 그렸다.

어스름한 푸른색은 몽환의 세계로 인도한다. 음악적 감수성과 결합한 나른한 정취는 이후 추상미술 탄생에 기여할 정도였다. 일각에서 그의 그림을 '구상과 추상 사이'로 부르는 이유다.

휘슬러 동료였던 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유명한 언술이 그의 안개를 거듭 보게 만든다. "휘슬러가 템스강의 안개를 그리기 전까지 런던에는 안개가 없었다."

안개는 물체를 숨기면서 드러내는 이중의 유기체로 운신한다. 제목처럼 아늑하고 잔잔한 음악이 들려오는 듯하다.

'녹턴-태양' (1872)
'녹턴-태양' (1872)

시카고 인스티튜트 미술관 소장

안개 속에서 정태춘은 자아를 발견하려 하고, 정훈희는 연인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린다. 이인문은 아직 오지 않은 산하를 찾고 있으며, 휘슬러는 아스라한 음악에 다가간다.

이 모든 '찾기'는 한 문장으로 집약된다. "안개 품은 강과 산은 다함이 없고, 그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도 끝없이 이어진다."

김승옥이 소설에 묘사한 상상 속 안개 도시, '무진(霧津)'이 아니다. 이인문에서처럼 우리 모두 나아가야 하는 '다함이 없는' 세상, '무진(無盡)'이다. 안개 속이라도 가야 할 '무진(無盡)', 그건 바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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