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대전 유산이 사라지다" 109년 역사 '유성호텔' 마지막 체크아웃

1915년 개관해 오는 31일 영업 종료…'성지순례' 이어져

현 부지와 주변에 24층 규모 주상복합·호텔 건물 들어설 예정

유성호텔
유성호텔

[유성호텔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강수환 기자 =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따라 자주 왔던 곳인데 아주 많이 아쉽네요."

109년 역사의 마침표를 찍는 대전 유성호텔의 마지막 주말, 호텔은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지난 28일 오전 박준범(54)씨는 아내와 함께 호텔 대온천탕을 찾았다.

대전에서 나고 자란 박씨는 "부모님을 따라 어린 시절부터 자주 왔고 어른이 돼서도 대온천탕 쿠폰을 사두고 자주 찾던 곳인데 영업을 종료한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아쉬웠다"고 말했다.

1915년 자연 용출 온천이 개발되면서 대전 유성구에 개관한 유성호텔은 109년간 지역 대표 향토호텔로 자리 잡았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선수촌호텔로, 1993년에는 대전엑스포 본부 호텔로 사용되며 많은 역사의 순간들이 머물다 갔다.

1966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후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도 나이가 들었고 그만큼 운영·관리상 어려움도 많았다.

사람들로 붐비는 대온천탕
사람들로 붐비는 대온천탕

[촬영 강수환]

호텔 측은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관광호텔 등을 짓기 위해 2022년부터 재개발 계획에 들어갔다.

공식적인 영업 기한은 오는 31일까지로 호텔은 마지막 체크아웃을 앞두고 있다.

◇ 영업 종료 앞둔 호텔 '성지순례' 이어져…"대전 유산이 사라지는 기분"

미디어를 통해 '호텔 영업이 종료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꾸준히 호텔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호텔을 경험하기 위해 '성지순례'처럼 호텔을 방문하고 인증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이날도 호텔 주차장은 거의 꽉 차 있었다. 대온천탕과 호텔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호텔 입구 'Since 1915'라고 쓰여 있는 포토존에서 사람들은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20대 딸과 함께 호텔을 찾았다는 김영희(53)씨는 "충남에 사는데 딸이 '영업 종료 전에 가야 한다'고 해서 같이 왔다"면서 "옛날 호텔 느낌이 그대로 있어서 추억도 돋고 기분이 이상하다"고 했다.

유성호텔 대온천탕에 마련된 포토존
유성호텔 대온천탕에 마련된 포토존

[촬영 강수환]

대온천탕에는 한 손에 목욕 바구니를 든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출입구를 오갔다.

대온천탕의 한 직원은 "명절 대목보다도 사람이 더 많다"면서 "'물이 좋다'고 소문이 나 단골들이 많은데 미리 사둔 목욕 쿠폰을 쓰러 오거나 쿠폰 환불 받으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입욕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 입에선 하나같이 "사람들이 정말 많다"며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친구와 함께 온천욕을 하러 온 박금옥(72)씨는 "특히 물이 좋아서 쿠폰 100장씩 사놓고 자주 방문했었는데 이런 공간이 사라진다니 지역주민으로서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지역 주민들의 사랑방이자 휴식의 공간이었던 만큼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이들의 수다도 끊이지 않았다.

"우리 아부지가 예전 유성국민핵교 시절부터 여기 다녔잖여. 여가(여기가) 물이 좋아서 그렇다니깐."

전날 친구들과 호텔 숙박을 한 강선아(27)씨는 이날 온천욕을 마치고 바나나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온천욕하고 바나나우유 마시는 강선아 씨와 친구
온천욕하고 바나나우유 마시는 강선아 씨와 친구

[촬영 강수환]

강씨는 "대전 토박이인데 호텔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지역 친구들과 함께 방문했다"며 "100년이 넘은 것 치고는 호텔 객실 상태가 괜찮았고 옛 선조가 이용했던 공간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묘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 "마치 꿈돌이랜드(2012년 폐장)가 사라졌을 때와 같은 느낌으로 대전 유산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 많은 아쉬움이 든다"고 섭섭해했다.

◇ 24층 규모 주상복합·호텔 건설 계획…대전시, 유성호텔 기록화 사업 착수

직원들은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담아 지난해부터 체크인 시 100여년 전 유성호텔이 그려진 목욕 바가지와 단지 모양의 바나나우유, 초코파이를 제공하며 호응을 얻기도 했다.

최초의 유성온천호텔(1918년)
최초의 유성온천호텔(1918년)

[촬영 강수환]

20대 때부터 호텔 시설팀에 몸담고 32년간 일해왔다는 한 직원은 "이 호텔에 몸 바쳐 일하면서 자식들을 다 키워낼 수 있었다"면서 "시원섭섭하지만 한편으로 후련하기도 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대온천탕 한 직원은 "영업 종료에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면서 "그동안 이곳에서 일할 수 있어서 행복했고, 호텔과 온천탕이 재개장해서 시민들에게 다시 기쁨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호텔 직원들은 최근 사직서를 모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측은 사직하게 된 직원들을 위한 지원 계획 등을 마련하며 영업 종료에 대해 서로 원만하게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호텔 영업 종료 배경은 기존에 알려진 '경영 악화'가 아닌 시설 노후화 때문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호텔의 재무 현황에 따르면 코로나19가 극심했던 2021년 이후로 최근 2년간 매출과 순이익은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1966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한 유성관광호텔
1966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한 유성관광호텔

[촬영 강수환]

한 호텔 관계자는 와 통화에서 "영업이익도 잘 나오고 있었고 객실도 만실일 때가 많았다"면서 "제일 큰 문제가 건물 노후화로, 운영하면서 시설 부분에서 이슈가 많아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주변 부지 일부를 매입한 호텔 측은 현 호텔 부지와 주변에 새롭게 건물을 지어 올릴 예정이다.

지난해 12월 호텔 측이 대전시에 사업계획 승인 신청을 했고, 이번주 시에서 사업계획 보완 내용을 요청하며 재협의에 들어간 상황이다.

호텔이 시에 낸 사업계획서에 따르면 호텔 측은 213개 객실을 보유한 호텔 1개동과 536세대의 주상복합건물 2개동을 현 호텔 부지와 근처에 새로 지을 계획이다.

건물은 24층 규모로 착공 예정일은 내년 7월로 예상된다.

대전시는 유성호텔의 역사성과 의미를 기억하기 위해 관련 예산을 확보하고 기록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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