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생태, 역사, 문화 이야기 풍성한 달성·달서 습지 길

국내 최대 맹꽁이 서식처를 가로지르는 탐방로

사문진 나루터[사진/ 조보희 기자]

사문진 나루터[사진/ 조보희 기자]

현경숙 기자 = 한반도에서 압록강 다음으로 긴 낙동강. 포항에서 발원해 경상북도 남동부를 서류해 대구를 관통하는 금호강. 대구시 지방하천인 진천천과 대명천. 네 하천은 대구 서쪽에서 만난다. 전통적으로 영남의 중심지였던 대구 외곽에 형성된 두물머리 아닌 '네물머리'인 만큼 자연 생태의 보고가 만들어지고, 이 지역이 다채로운 역사, 문화의 무대가 된 것은 당연하다 싶다.

◇ '네물머리'에 발달한 맹꽁이 서식처, 달성습지·대명유수지

4개 하천이 만나는 지점에 강의 범람이 만들어낸 '생명의 슈퍼마켓' 달성습지와 대명유수지가 있다. 둑 하나를 사이에 둔 두 공간은 국내 최대의 맹꽁이 서식처이다.

농촌은 물론 도시 근교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던 맹꽁이는 도시 확장, 농약 살포 등으로 개체 수가 급격히 감소해 환경부가 멸종위기 2급으로 지정한 희귀종이다. 약 200만㎡에 이르는 습지와 금호강 일대는 겨울 철새인 흑두루미의 도래지이기도 했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흑두루미 재도래를 위한 생태계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속하는 달성습지, 달서구 관할인 대명유수지 근방에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과 광활하게 펼쳐진 대구 분지를 조망하며 걸을 수 있는 도보여행 길이 있다. 낙동강 물류의 최대 중심지였던 사문진 나루터에서 시작해 달성습지생태학습관∼대명유수지∼달성습지∼강창교∼이락서당∼죽곡댓잎소리길∼디아크문화관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거리는 8∼9㎞로 여겨진다.

대명유수지 중간에 나 있는 탐방로[사진/ 조보희 기자]

대명유수지 중간에 나 있는 탐방로[사진/ 조보희 기자]

출렁이는 강물 위로는 단정한 나무 데크 길이 시원스럽게 놓여 있고, 습지 숲과 대나무 숲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그늘이 더위를 식혀 준다. 흙길과 보도블록이 깔린 인도가 교차하기도 한다. 앞산 자락길 등 대구에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도보 여행길이 적지 않다. 하지만 취재진이 걸었던 길은 아직 이름이 없다. 보호구역이었던 달성습지의 일부가 개방되고, 대구 서부의 화원유원지가 개발되면서 비교적 최근에 시쳇말로 '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길을 달성·달서 습지 길이라고 불러본다. 관할 지자체가 달성군과 달서구로 이원화돼 있는 이 길이 유기적으로 잘 관리되길 기대한다. 이 코스 주변에는 화원누리길, 강정보 녹색길, 달성보 녹색길 등이 촘촘하게 조성돼 있고, 자전거길인 달성습지 코스도 사랑받고 있다. 그만큼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 최초의 피아노 유입지…사문진 나루터

사문진 나루터에는 이색 음악회가 연례로 열린다. '달성 100대 피아노' 공연이다. 2010년대 초반부터 열린 이 공연은 1900년 피아노가 이 나루터를 통해 한국에 처음 도입된 것을 모티브로 한 행사이다.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들여온 이 피아노를 마을 사람들은 운반 중에 나무통 안에서 괴상한 소리가 난다는 이유로 귀신통이라고 부르며 신기해했다.

그로부터 1년 뒤 다시 한 대의 피아노가 사문진 나루터로 들어오는데, 이 피아노는 대구 신명학교에 기증됐다.

1900년 사문진 나루터로 들어온 피아노를 기념하는 조형물[사진/ 조보희 기자]

1900년 사문진 나루터로 들어온 피아노를 기념하는 조형물[사진/ 조보희 기자]

달성군 화원읍과 고령군 다산면을 연결하는 사문진 나루는 낙동강 상류와 하류, 낙동강과 금호강을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충지이자 대구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낙동강은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상인들은 물론, 일본 무역상들이 이용하는 대표적 물품 수송로였다.

사문진에는 화원창, 왜물고 등 일본산 수입품을 보관하는 창고가 설치되기도 했다. 철도, 도로, 교량 등 육상 교통망이 발달한 현대에 사문진은 화물선이 다니지 않은 지 오래이지만, 유람선이 운항하고 주막촌, 화원유원지, 야외공연장 등이 조성돼 대구 시민과 관광객에게 쉼터가 되고 있다.

고대에 사문진은 신라와 대가야가 대치하던 최전선이었다. 대가야가 있던 고령과 신라 영토였던 화원읍 구라리에는 당시의 고분군과 성터가 남아 있다. 사문진에서 달성습지생태학습관으로 이어지는 하상 데크 길 오른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의 풍광이 멋스러운 성산이 자리 잡고 있다. 낙동강 푸른 물줄기와 꽃, 수목이 어우러진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이 절벽은 상화대라 불린다.

구라리 지명은 신라 경덕왕이 이곳 풍광에 반해 아홉 번 방문한 데서 유래했다는 전설이 있다. 달성습지생태학습관 옥상에 서면 낙동강과 금호강의 합수머리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대명유수지 너머, 중부내륙고속도로 지선과 대구 외곽순환고속도로 사이에 자리 잡은 드넓은 성서공단은 대구가 소비 도시만은 아님을 웅변한다.

달성습지[사진/ 조보희 기자]

달성습지[사진/ 조보희 기자]

길을 안내한 송은석 대구유교문화연구소장은 "6·25전쟁 때 최후 보루였던 낙동강은 성서공단과 함께 현대사를 증언한다"며 "이곳 낙동강변은 선사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심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습지를 지나 가로수 그늘이 짙은 인도를 3㎞쯤 걸으면 강창교를 건너게 된다. 다리 옆에는 이락서당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후기 대구 서부의 이름난 서당이었던 이 배움터는 앞으로 금호강이 흐르고 뒤로 산책로가 있는 궁산에 자리 잡고 있다. 직벽에 가까운 궁산 절벽은 금호강에서 경치가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이다.

강창교는 2010년 준공됐다. 현재 강창교가 서당의 앉음새를 옹색하게 만들고 있지만 옛날 금호강과 궁산이 빚었을 경관을 상상하면 학문과 수신을 위해 자연을 가까이했던 선비들의 풍모를 머릿속에 그리기 어렵지 않았다.

강창교와 가까운 죽곡산은 공산(현재의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한 고려 태조 왕건이 경북 칠곡으로 도망갈 때 거쳐 갔던 곳으로 추정된다. 고려와 후백제의 격전 중 하나였던 공산 전투로 인해 대구에는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도 원래 이름이 공산이었으나 왕건의 장수 8명이 이 전투에서 숨진 뒤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달성습지생태학습관에서 바라본 낙동강·금호강 합수머리. [사진/ 조보희 기자]

달성습지생태학습관에서 바라본 낙동강·금호강 합수머리. [사진/ 조보희 기자]

대구 동구, 경북 영천, 경북 군위의 경계에 있는 팔공산은 23번째 국립공원 지정을 앞두고 있다. 해발 1,192.3m인 팔공산은 대구 분지의 북부를 길게 병풍처럼 가리고 있다. 이 산군을 팔공산맥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대구의 자연 지형을 말할 때 팔공산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비슬산이다. '북팔공 남비슬'이 회자되는 이유이다. 달성군과 경북 청도군의 경계에 있는 비슬산(1083.4m)은 대구 남쪽을 에두른 천연 성벽으로, 팔공산과 마주 보며 대구 분지를 만들어낸다. 달성습지생태학습관 옥상, 디아크문화관 전망대를 비롯해 길을 걷는 곳곳에서 유장한 낙동강과, 그것을 말없이 굽어보는 팔공산과 비슬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 삶과 문화가 머무는 곳

강변과 습지 숲길에는 풍요로운 자연만큼이나 짙은 삶과 문화의 향기가 배 있었다. 여정의 종점인 디아크 문화관은 강과 물, 자연을 소재로 한 건축이자 예술 작품이다. 전시, 공연, 교육 등의 행사장인 디아크는 세계적 건축 설계자인 하니 라시드 작품이다.

잔잔한 물 위에 돌을 튕겨 만드는 물수제비, 수면 위로 떠오르는 물고기, 한국의 전통 도자기인 막사발을 형상화했다. 동적인 동시에 정적이고, 현대와 전통을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디아크 광장에서는 달성대구현대미술제가 매년 열린다.

디아크 문화관[사진/ 조보희 기자]

디아크 문화관[사진/ 조보희 기자]

사문진 나루에서 강창교에 이르는 구간은 조선 선비들 사이에 꽃피었던 구곡(九曲) 문화와 선유(뱃놀이) 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근대 개항기 학자인 우성규는 금호강을 아홉 굽이로 나누어 그 경치를 읊었다. 그중 6개 굽이가 사문진 나루와 강창교 사이에 있다. 구곡문화는 경치만 즐기는 신선놀음과는 거리가 멀다. 구곡문화의 밑바탕에는 학문과 도리에 대한 탐구 의식이 깔려 있다.

대구는 더운 도시로 인식돼 있지만 근년의 숲 가꾸기 이후 더운 도시 1위라는 불명예를 벗어 던졌다. 낙동강을 끼고 있는 대구는 대신 인간과 자연을 위한 물관리를 논의하기 위해 세계물도시포럼(WWCF)을 2015년부터 매년 여는 등 '물의 도시'를 표방한다.

사문진 주막촌과 화원유원지에는 쉼을 통해 삶을 모색하려는 시민과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00대 피아노 공연 때면 방문객이 100만 명을 헤아린다. 낙동강이 펼친 삶의 무대는 오늘도 확장되고 있다.

※ 이 기사는 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7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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